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켄 덴노 (문단 편집) === 죽음과 사후 승계 === 이듬해(770년) 2월에 쇼토쿠 여제는 다시 유의궁에 행차했지만, 3월 중에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이때 간병을 위해 옆을 드나든 것은 궁인(宮人) 기비노 유리(吉備由利)뿐이었고, 법왕 도쿄는 쇼토쿠 여제가 붕어하기 전까지 만날 수 없었다. 도쿄의 권력은 금세 쇠약해졌고, 군사 지휘권은 후지와라노 나가테나 기비노 마키비 등의 태정관에게 빼앗겼다. 8월 4일, 쇼토쿠 여제는 헤이조쿄 서궁의 침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여제의 나이 57세였으며, 사인은 [[천연두]]였다. 회복을 바라는 기도를 했다는 사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의료행위]]를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나아가 암살설까지 나왔다. 쇼토쿠 여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여제 사후 군신이 모여 후사를 의논했는데, 기비노 마키비는 덴무 천황의 손자로서 신적강하된 훈야노 오오치(文室大市)나 훈야노 기요미(文室浄三)를 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나가테, 후지와라노 스쿠나마로(藤原宿奈麻呂),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 등은 주나곤이었던 시라카베 왕을 추천했다.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기비노 마키비에게 나가테 등은 시라카베 왕을 후사로 지명한 쇼토쿠 여제의 유조를 읽어보였고, 때문에 시라카베 왕이 즉위했지만, 오늘날 이 유조는 위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곧 도쿄는 실각하여 시모쓰케(下野)국 야쿠시지 별당에 좌천되었고, 유게노 키요히토도 도사(土佐)로 유배되었으며, 간전 사유도 호키(寶龜) 3년(772년)에 재개되었다. 이러한 일들 때문인지 여제의 즉위가 금지되었으며, [[에도 시대]]의 [[메이쇼 덴노]]가 즉위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여제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후에 등장한 여성 천황은 [[메이쇼 덴노]]와 [[고사쿠라마치 덴노]]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